한국의 갯벌우리나라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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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등재
기준
구분 등재
년도
특징, 가치 주요문화재 지역
종묘
Jongmyo Shrine
문화
유산
1995 유교의 조상 숭배관이 한국의 독특한 건축 형식으로 해결된 사례를 보여주는 사묘건축 종묘(사적125), 정전(국보227), 영녕전(보물821) 서울
해인사 장경판전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iv,vi 문화
유산
1995 장경판의 장기 보존을 위해 과학적으로 해결한 독특한 건물형식과 건축 구조를 보여주는 유일한 사례 해인사 장경판전(국보52), 해인사 대장경판(국보32) 경남
석굴암·불국사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i,iv 문화
유산
1995 한국 고대 불교 예술과 건축의 특출한 사례를 보여주는 문화유산 불국사(사적502), 석굴암(국보24) 경북
창덕궁
Changdeokgung Palace Complex
ii,iii,iv 문화
유산
1997 건축과 조경이 잘 조화된 동아시아 궁궐건축 디자인의 대표적 사례 창덕궁(사적122), 인정전(국보225), 회화나무군(천연기념물472) 서울
수원 화성
Hwaseong Fortress
ii,iii 문화
유산
1997 전통적 축성기법에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계획에 의해 조성한 성곽건축의 대표적인 사례 수원화성(사적3), 팔달문(보물402) 경기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ii,iii 문화
유산
2000 고대 왕도의 불교 및 생활문화와 관련된 기념물과 유적들의 성격과 탁월한 예술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 경주 남산(사적311), 황룡사터(사적6), 분황사삼층석탑(국보30) 경북
고창·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
iii 문화
유산
2000 선사시대의 장묘문화 및 사회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거석 기념물 고창 고인돌(사적391), 화순 고인돌(사적410), 강화 고인돌(사적137) 전북(고창),
전남(화순),
인천(강화)
조선왕릉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iii,iv,vi 문화
유산
2009 유교 예법에 근거한 조선왕조의 장묘문화와 환경설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동구릉(사적193), 서오릉(사적198), 서심릉(사적200) 서울
경기
강원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Historic Villages of Korea: Hahoe and Yangdong
iii,iv 문화
유산
2010 한국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양반 씨족마을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122), 경주양동마을(중민189) 경북
남한산성
Namhansanseong
ⅱ,ⅳ 문화
유산
2014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건설된 산성 남한산성(사적57) 경기(광주,
성남, 하남)
백제역사유적지구
Baekje Historic Areas
ⅱ,ⅲ 문화
유산
2015 이웃한 지역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고대 백제 왕국의 후기 시대를 대표 공주 공산성(사적 12), 송산리 고분군(사적 13), 부여관북리유적(사적 428), 부소산성(사적 5), 정림사지 사적 301), 부여 나성(사적 58), 능산리 고분군(사적 14),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408), 미륵사지(사적 150) 충남(공주,
부여), 전북(익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
ⅱ,ⅲ, ⅳ 문화
유산
2018 현존하는 불교신앙이 거쳐 온 전체적 역사적 과정과 함께 한국 전통의 건축 형식, 공간의 표현을 잘 보여주는 사례 선암사(사적 제507호), 대흥사(사적 제508호), 법주사(사적 제503호), 마곡사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국보 제290호), 봉정사 대웅전(국보 제311호),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전남(순천, 해남),
충북(보은),
충남(공주),
경남(양산),
경북(안동, 영주)
한국의 서원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문화
유산
2019 조선시대 핵심 이념인 성리학을 보급하고 구현한 곳,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하는 한국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 소수서원(사적 제55호),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병산서원(사적 제260호),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도동서원(사적 제488호), 남계서원(사적 제499호), 필암서원(사적 제242호), 무성서원(사적 제166호), 돈암서원(사적 제383호) 경북(영주, 안동, 경주), 대구, 경남(함양), 전남(장성), 전북(정읍), 충남(논산)

종묘

종묘
종묘
종묘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서울시(Seoul City)
좌표 N37 32 60 E126 58 59.988
등재연도 1995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종묘(宗廟)는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왕이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문무백관(文武百官)과 함께 정기적으로 제사에 참여한 공간으로 왕실의 상징성과 정통성을 보여 준다. 동아시아의 유교적 왕실 제례 건축으로서 공간계획 방식이 매우 독특하고 그 보존 상태가 우수하다. 14세기 말에 창건되어 유지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세기 초에 중건하였고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중심 건물인 종묘 정전(宗廟 正殿)은 정면이 매우 길고 건물 앞마당과 일체를 이루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예외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동아시아 유교 문화의 오랜 정신적 전통인 조상숭배 사상과 제사 의례를 바탕으로 왕실 주도 하에 엄격한 형식에 따라 지어졌으며 현재에도 조선 시대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종묘제례(宗廟祭禮)라 불리는 제사 의례가 행해지고 있으며 제사에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의 음악과 춤이 동반된다. 종묘의 건축과 관리, 제례 봉행에 관한 모든 사항은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으로 상세히 남아있다.

영문명

Jongmyo Shrine

등재기준

기준 (ⅳ) : 종묘는 유교 예제에 따라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기반시설이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유교의 조상숭배관이 독특하게 결합된 한국의 사묘 건축 유형에 속한다. 죽은 자들을 위한 혼령의 세계를 조영한 건축답게 건물의 배치, 공간구성, 건축 형식과 재료에서 절제, 단아함, 신성함, 엄숙함, 영속성을 느낄 수 있다. 건축물과 함께 제사, 음악, 무용, 음식 등 무형유산이 함께 보존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정기적으로 제례가 행해진다는 점에서 종묘의 문화유산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완전성

종묘는 제향 공간과 건축물, 제향을 지원하는 부속 공간과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건물과 시설물은 조선 시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심과 분리되어 있다. 종묘와 그 주변 경관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보호되고 있으며, 종묘제례 및 제례악 또한 국가 지정 문화재이다. 종묘제례는 매년 정기적으로 봉행된다.

진정성

종묘는 유형적 원형과 무형적 행례 절차에 있어 세계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종묘의 공간 배치와 건축은 조선 시대 축조 당시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제의와 음악, 춤 또한 잘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17세기에 중건된 건물은 선왕의 신위 수가 늘어남에 따라 두 차례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조건물의 특성상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왔지만 보수공사 또한 관련 문헌과 연구를 바탕으로 전통 법식에 맞는 재료와 기술을 이용해 공인된 장인들이 진행한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서 체계적으로 전승, 보호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종묘는 조선왕조의 선왕들을 모시는 유교 사당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8월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같은 해 12월 중추원부사 최이에게 종묘를 짓도록 명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에 완성된 종묘는 처음에 ‘태묘(太廟)’라고 했으며, 태조의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종묘로 옮겨 보관했다.

세종 원년(1419년)에는 조선 2대 왕 정종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태묘의 서쪽에 별묘인 영녕전을 지었다. 공간이 부족해지자 1547년에는 네 개의 묘실을 증축했다. 1592년 5월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종묘의 신주들을 가지고 피신했지만, 종묘 건물은 모두 파괴되었다. 그후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1667년에 영녕전을 증축했고 1778년과 1836년에는 정전을 증축하여, 영녕전과 정전의 묘실 수는 각각 8실과 19실로 늘어났다. 이후에도 증축이 이루어져, 현재는 영녕전은 16실, 정전에는 19실이 있다. 또한 정전에서 매년 거행되는 제사인 종묘제례는 굉장히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중요한 무형문화재이다. 음악, 노래, 춤을 아우르는 종묘제례는 14세기 말 태조 때 중국에서 들어온 궁중음악을 기원으로 한다.

보존 및 관리체계

종묘의 전 영역과 정전, 영녕전 등 주요 건물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14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그 형태가 온전히 전해져 온 종묘제례 및 제례악 또한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이다.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100m 이내의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종로구 조례에 따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해당 구역 내의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종묘의 보존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기관으로 종묘의 건물 및 시설물 보수정비, 발굴, 예산 지원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또한 25명가량의 직원들이 배치된 종묘관리소는 현장에서 직접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상시 모니터링이 진행되고 있으며 3, 4년 주기로 전문가들이 정밀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도시교통과, 문화재과가 협력하여 종묘 주변지역을 관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주기적으로 기본 경관 계획, 지구 단위 계획을 수립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방안 및 사업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종묘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종묘의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진행한다. 목조건축물의 가장 큰 위협요소는 화재 위험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5대궁 및 종묘 종합경비시스템구축사업’을 추진하여 화재를 비롯한 문화재 훼손과 재난에 대비하고 있다.

유산면적

19㏊

참고번호

738

본문

종묘는 선왕을 기리는 유교 사당의 뛰어난 예이다. 16세기 이후 상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조선왕조(1392~1910)의 선왕들을 모시는 사당인 종묘에서는 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가 거행되어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에 수도를 한양(漢陽, 현재의 서울)으로 옮기면서 종묘를 건축하도록 명했고, 태조의 4대조 신주를 개성에서 종묘로 옮겼다. 이후 후대 왕들의 신주를 모실 건물을 증축했고, 정전(正殿)에 있던 신주(神主) 일부를 새로 지은 영녕전(永寧殿, 16실)으로 옮겼다. 종묘에는 모두 35실이 있다.

종묘는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계곡에 위치하며, 전통 풍수지리에 따라 자연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종묘는 각각 향대청(香大廳), 정전(주전), 영녕전(별묘)을 중심으로 하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 주요 구성 요소로는 두꺼운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외대문(정문), 제례가 거행되기 전에 왕이 대기하던 기와지붕 목조건물인 망묘루, 태조가 고려 공민왕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지었던 공민왕신당, 제례에 사용하던 물품들을 보관하던 향대청, 참가자들이 의식이 거행되기를 기다리던 재실(齋室, 주 건물과 양옆의 부속 건물로 구성됨) 등이 있다.

정전은 남문, 동문, 서문이 달린 직사각형 모양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닥에는 거친 화강암으로 만든 묘정 월대(廟庭月臺)가 넓게 깔려 있다. 세 개의 계단이 돌 기단에서 정전을 향해 나 있으며, 보다 작은 계단들이 양옆 끝에 있다. 정전은 목조건축물이며, 그 좌우에는 월대 쪽으로 나온 동월랑(東月廊)·서월랑(西月廊)이 딸려 있다.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정전은 개방된 정면에 긴 복도가 있고, 나무문이 달려 있는 내부에 19실이 있다. 이 묘실들은 다시 여러 개의 칸으로 구분되어 신주 49개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칸막이가 쳐진 협실이 딸려 있다. 정전의 박공지붕은 소박한 목재 까치발이 받치고 있다. 영령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정문으로는 사람의 통행을 금지했다. 왕은 동문으로 드나들었으며, 악사들은 더 작은 서문으로 다녔다.

칠사당은 사명(司命), 사호(司戶), 사조(司竈), 중류(中霤), 국문(國門), 공려(公厲), 국행(國行) 등의 칠사(七祀)와 함께 역병으로 사망한 이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공신당(功臣堂)은 역대 공신 83명의 신주를 모신 곳이며, 전사청(典祀廳)은 제례에 사용된 물품과 예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정전 수복방(守僕房)은 관원들의 거처로, 제례에 쓰일 제물을 검사하는 곳이기도 했다.

영녕전에는 정전에 있던 왕들의 신주를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옮겨서 보관했는데, 정전에 계속 모실 수 없는 왕들의 신주를 옮겨 모셨다. 영녕전은 문이 세 개가 달린 직사각형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당에는 얇은 화강암이 깔려 있다. 영녕전의 주 건물 양옆에는 크기가 다른 곁방이 딸려 있다. 둥근 기둥의 꼭대기에는 목재 까치발이 달려서 박공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
좌표 N35 47 60, E128 5 60
등재연도 1995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海印寺) 장경판전(藏經板殿)은 13세기에 제작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봉안하기 위해 지어진 목판 보관용 건축물이다. 주불전 뒤 언덕 위에 세워진 단층 목조건물로 15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부터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 지어졌고 창건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장경 자체도 인류의 중요한 기록유산이지만 판전 또한 매우 아름답고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유산이다. 장경판전은 두 개의 긴 중심 건물 사이에 작은 두 개의 건물이 하나의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건물 자체는 장식적 의장이 적어 간결, 소박하며 조선 초기의 목구조 형식을 보여 준다.

영문명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등재기준

기준 (ⅳ) :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대장경 목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건축물이다. 효과적인 건물 배치와 창호 계획을 고려하는 동시에 경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방식을 활용함으로써 대장경판을 오랜 기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자연통풍과 적절한 온도 및 습도 조절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었다. 건물 안에 있는 판가 역시 실내온도와 습도가 균일하게 유지되도록 배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과학적 방법은 600년이 넘도록 변형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의 보존 상태에서 그 효과가 입증된다.

기준 (ⅵ) : 고려 시대의 국가사업으로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그 내용의 완전성과 정확성, 판각 기술의 예술성과 기술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전 세계 불교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는다.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과 연관해 이해해야 하며 건축적, 과학적 측면에서 목판의 장기적 보존을 위해 15세기에 고안된 탁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완전성

해인사 전체가 유산의 경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장경판전은 해인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해인사는 부처의 가르침인 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어 삼보사찰(三寶寺刹) 가운데 하나인 법보사찰(法寶寺刹)로 불린다.

진정성

판전에는 현재 8만여 개의 고려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건물 원형과 기능이 그대로 유지, 보존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몇 차례에 걸쳐 건물 보수공사가 진행되었으나 모두 유지관리 차원의 부분적 수리였다. 건물의 전반적인 배치에서 건축적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변형이나 파손 없이 창건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역사적 배경

해인사는 한국의 아름다운 산의 중 하나인 가야산(1,430m)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인 802년에 지어진 후 수차례 복구와 확장을 겪었다. 그러나 그 거친 산세 덕분에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겪어 왔던 숱한 전쟁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장경판고(藏經板庫)는 팔만대장경이 새겨진 8만 개의 목판들을 보관하는 네 군데의 보관소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의 형태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왕조의 성종이 통치하던 1481년에 왕비가 복구를 명했고, 1488년에 복구 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보관소들 중의 하나인 수다라장(修多羅藏)은 1622년에 복구되었고, 또 다른 주 보관소인 법보전은 1624년(1964년 복구 작업 중에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알려짐)에 복구되었다. 보관소들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남아 원래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불교 경전의 집성인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이 대장경은 고려 현종 재위(1010~1031) 당시에 새겨진 최초의 팔만대장경(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목판을 교체하기 위해 새겨졌으며, 몽골과 거란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지키고자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첫 목판들은 몽골이 침략한 1232년에 만들어졌다. 기나긴 항전이 시작된 그해에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옮아가, 1237년에 2종 113권으로 시작된 작업은 12년 후에 완료되어 목차만 3권에 달하는 1,496종 6,568권의 대장경이 탄생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한자로 새겨진 현존하는 대장경들 중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대장경 제작을 담당했던 수기대사(守其大師)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 당시에 볼 수 있는 모든 불교 경전들을 철저히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교정하고 누락된 한자들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교정 작업은 30권에 달하는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북송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대장경으로,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의 경전은 팔만대장경에 실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산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1251년에는 제작을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318년에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고려 말기의 빈번한 외침 때문에 1398년에 현재의 보관소로 옮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국왕이 대장경의 이송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용산강(지금의 한강)으로 행차했다고 전해진다.

보존 및 관리체계

해인사 장경판과 장경판전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각각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해인사 전역과 가야산 일대 역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보호법과 경상남도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는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한편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은 자연공원법에 따라 국립공원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장경판전과 대장경판 보존을 위한 예산을 배분하고 보수와 유지 관리 및 주변 지역 현상 변경과 관련해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다. 경상남도는 해인사 보존을 위한 예산 지원을 담당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보존 관리 및 정비 사업은 합천군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합천군은 해인사의 보존 관리에 직접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현장에서는 해인사가 대장경판의 보존 관리를 책임지며, 홈페이지를 통해 대장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산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과 함께 3, 4년 주기로 전문가의 정밀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유산의 보존은 물리적 환경에 대한 보존 관리와 함께 기록유산으로서의 장경판의 가치에 주목해 이루어지며,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로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담당한다. 해인사 장경판전과 대장경판의 보존에 있어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물과 경판의 화재 위험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장경판전 감시인을 배치해 24시간 동안 판전 등 사찰 경내를 경비하고, 낙뢰 방지를 위한 피뢰침을 설치하는 한편 화재가 일어났을 때 사찰의 자체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형 소방 펌프차를 배치하였다. 현재 판전 내부는 적정한 온도 및 습도 유지를 위해 관람객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참고번호

737

본문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목판은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기 위해 부처에게 기원하는 뜻으로 새겨진 것이다. 세계의 불교 연구가들은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글자들의 뛰어난 정확성과 우수한 문화적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중국의 불교 연구가들은 중국 불경을 연구하는 데 팔만대장경을 참고하기도 했다. 섬세하게 새겨진 한자들 역시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더해 주는데, 글자를 새긴 방식이 일관된다는 점에서 한 사람이 작업한 결과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뛰어난 역사성과 함께 사상, 종교, 역사적 사건, 개인적 경험들이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문화유산이 된다. 한국의 역사적인 불교 사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우수한 세 곳을 삼보사찰이라 하는데, 한국 최대 규모의 사찰인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의 보고(寶庫)라는 점 때문에 법보사찰로 알려져 있다. ‘법보’는 불교 교리의 근간이 되는 부처의 가르침들을 뜻하는 용어이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불교 경전이 보관된 해인사는 한국의 불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불교 신자와 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순례지다. 해인사에는 현재 500여 명의 승려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팔만대장경을 보전하면서 수행 생활을 하고 있다.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목판을 보관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중요한 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 예술, 과학, 산업 등의 발전을 보여주는 특색 있는 문화유산이다. 장경판전은 조선 초기의 전통 목조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미적인 면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배치, 규모, 목판 보존을 위한 기능성 면에서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경판전은 자연 환기가 되고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게끔 각별하게 설계되어 기후 조건에 잘 적응한다. 귀중한 목판들은 500여 년 동안이나 설치류, 벌레 등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석굴암·불국사

석굴암·불국사
석굴암·불국사
석굴암·불국사
석굴암·불국사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좌표 N35 46 60, E129 20 60
등재연도 1995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불교 유적이다. 석굴암은 불상을 모신 석굴이며, 불국사는 사찰 건축물이다. 두 유산은 모두 경주시 동남쪽의 토함산(吐含山)에 있으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두 유산은 8세기 후반에 같은 인물이 계획해 조영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다. 석굴암은 화강암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석굴로 원형의 주실 중앙에 본존불(本尊佛)을 안치하고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나한상, 신장상 등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고대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 준다. 특히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 기단 및 두 개의 석탑은 동북아시아 고대 불교예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영문명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등재기준

기준 (ⅰ) :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인들의 창조적 예술 감각과 뛰어난 기술로 조영한 불교 건축과 조각으로 경주 토함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한국 고대 불교예술의 정수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기준 (ⅳ) : 석굴암과 불국사는 8세기 전후의 통일신라 시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건축과 조각으로, 석굴암은 인공적으로 축조된 석굴과 불상 조각에 나타난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 불국사는 석조 기단과 목조건축이 잘 조화된 고대 한국 사찰 건축의 특출한 예로서 그 가치가 두드러진다.

완전성

석굴암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불국사는 불법의 세계를 현실 세계에 구현한 걸작으로, 이들 두 유산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 전 영역과 두 유산이 위치한 토함산이 유산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진정성

석굴암 본존불과 그 주위 대부분의 석조 조각과 건축의 형태는 8세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정성이 높다. 불국사 경내의 석조 유산은 부분적 보수 과정을 거쳤을 뿐 신라 시대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목조 건축물들은 16세기부터 보수와 복원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든 복원 사업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전통 재료와 기술이 사용되었다.

참고번호

736

본문

토함산 남동쪽 비탈에 있는 석굴암은 동해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인 751년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 10년인 774년에 완공됐다. 기록에 따르면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벽에는 39개의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한가운데에 본존불상이 놓여 있다.

석굴암은 전실(前室), 비도(扉道), 돔형 주실(主室)로 구성된다. 전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에는 팔부신장(八部神將)이 각각 네 사람씩 새겨져 있다. 비도는 전실에서 주실로 들어가는 부분인데, 비도의 입구 옆에는 두 사람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서 있다. 비도의 좁아지는 부분 양쪽으로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각 한 쌍씩 조각되어 있다. 주실의 입구 양쪽에 팔각형 돌기둥 두 개가 각각 세워져 있고, 본존불상은 주실의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에 놓여 있다. 주실의 입구 양쪽 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두 보살, 십나한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상 뒤의 벽 한가운데에는 자비의 보살로 알려진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새겨져 있다.

전실과 주실의 벽에 새겨진 불상들 아래 놓여 있는 돌에도 마찬가지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석굴암이 만들어진 당시에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 있었던 대리석 사리탑은 일제강점기 때 제거됐다. 본존불상 뒤의 벽에 새겨진 십일면관음보살상 위에는 거대한 원형 연판(蓮瓣)이 조각되어 있다. 이 원형 연판은 정면에서 보면 마치 본존불상의 후광인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연판 위쪽 벽에는 열 개의 감실들이 가로로 늘어서 있다. 감실 각각에는 보살이나 불자의 조각상이 놓여 있었으나, 현재 그 중 두 개가 없어진 상태다. 돔형 천장을 구성하는 돌들은 주실 천장의 또 다른 연판을 향해 모아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본존불상인 석가여래좌상은 3.45m 높이로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다. 불상의 머리카락은 달라붙은 곱슬머리이며, 정수리에는 궁극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肉髻)가 돌기처럼 튀어나와 있다. 이마는 넓고, 초승달 같은 눈썹 아래로 반쯤 감은 눈은 동해를 응시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 걸쳐져 왼팔과 가슴을 덮은 모양의 법복은 섬세하고도 현실적이다. 불상은 부좌 상태에서 항마촉지인이라는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지신(地神)을 소환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할 때 취했던 동작이다. 금강역사상, 팔부신장상, 천부상, 보살상, 십나한상, 사천왕상 등의 다른 조각들도 모두 세부적인 자연스러움에 주의를 기울여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석굴암의 본존불상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는 걸작이라면, 불국사는 신라의 이상향인 불국토를 현세에 드러내고자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동시에 만들어졌는데, 불국사의 축조를 시작하고 지휘한 사람 역시 석굴암을 만든 재상 김대성이었다. 효심이 깊었던 김대성은 현생의 부모를 기리며 불국사를 세웠고, 전생의 부모들을 기리며 석굴암을 지었다.

이승에 부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신라의 오랜 꿈이었고,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다. 때문에 불국사라는 이름 자체도 신라인들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부처님 나라의 사찰을 뜻한다. 이것은 곧 불국사가 부처님의 나라가 현세에 실현된 낙원이라는 의미다.

불국사 경내는 이승에 실현된 불교적 이상향이라 여겨졌다. 석단(石壇) 위에 지어진 목조 건축물들은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비로자나불의 전당인 비로전, 득도의 전당인 대웅전, 지복의 전당인 극락전이 그것이다. 세 구역은 하나의 현세 공간과 두 개의 천상 공간을 상징하고 있다. 순수한 부처의 나라로, 비로자나불이 존재하는 현세, 아미타불의 낙원,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비로전, 극락전, 대웅전을 포함해 석단 위의 공간은 곧 부처의 나라이며, 석단 아래의 공간은 이승이다. 이 두 세계는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두 쌍의 다리로 연결된다. 석단, 석교(石橋), 그리고 대웅전 앞에 세워진 석가탑과 다보탑은 신라 시대의 우수한 석공 기술을 보여 준다.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불국사는 손으로 다루기 힘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옛날에 불국사에는 토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로 만들어진 구품연지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구품연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토함산의 물이 흘렀던 수구의 흔적이 아직까지 석단에 남아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불국사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목조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다행히 석단, 석교, 석탑, 등(燈), 금으로 도금된 청동 불상들은 무사히 남았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불국사의 건축물은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시행된 복구 작업을 통해 부분적으로 재건된 것이다. 복구는 불국사 유적의 발굴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나, 신라 시대 당시의 대규모 복합 건축물을 재현해 내지는 못했다. 불국사의 중심에 위치한 대웅전 앞뜰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동서로 놓여 있다. 통일신라 시대 이래 사찰의 주 건물 앞에는 동일한 외관을 가진 한 쌍의 탑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으나, 다보탑과 석가탑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에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파할 때 보배로운 탑이 땅에서 솟아났고, 이미 깨달음을 얻은 다보여래가 그 탑 위에 나타나 석가모니의 설법을 증명했다. 그리고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는 탑 안에 나란히 앉았다는 것이다. 다보탑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보여래를, 석가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하고 있다.

폭 6.7㎝, 길이 6.2m의 두루마리에 적힌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또한 주목할 만하다. ‘흠 없이 순수한 빛의 위대한 다라니경’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유물은 1966년에 석가탑의 2층에서 발견됐다. 8세기경에 만들어진 이 경전은 목판으로 인쇄된 경전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창덕궁

창덕궁
창덕궁
창덕궁
창덕궁
창덕궁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서울시(Seoul City)
좌표 N37 32 60, E126 58 60
등재연도 1997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창덕궁(昌德宮)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궁궐이다. 건축과 조경이 잘 조화된 종합 환경디자인 사례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인 공간 분위기를 읽게 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15세기 초에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이궁으로 조성되었으며, 그에 따라 애초의 건립 목적이나 도성 내에 자리한 입지도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

창덕궁이 자리한 곳은 언덕 지형으로 평탄한 곳이 많지 않다.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이러한 불규칙한 지형지세를 이용해 궁궐 건물을 경내 남쪽에 배치하고, 북쪽 넓은 구릉에는 비원이라고도 불리는 후원을 조성하였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건물을 세운 까닭에 궁궐 건축의 전형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는 특색을 지녔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이궁으로 조선 전기의 약 200년 동안 왕의 통치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소실된 도성 내 궁궐 중 가장 먼저 중건되며 이후 약 250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 역할을 했다. 건축사에 있어 조선 시대 궁궐의 한 전형을 보여 주며, 후원의 조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왕실 정원으로서 가치가 높다.

영문명

Changdeokgung Palace Complex

등재기준

기준 (ⅱ) : 창덕궁은 유교 예제에 입각한 궁궐 건축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건물의 배치나 진입 방식에서는 우리나라 궁궐 건축의 다양한 특성을 보여 준다.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은 서남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으며, 정문의 진입로에서 직각으로 두 차례 방향을 틀어야 정전에 도달할 수 있는 구조이다. 지형지세에 따라 조성된 이러한 진입로의 배치는 남북 방향의 일직선 중심축을 따르는 경복궁이나 중국의 궁궐과는 차이가 있다. 건물과 주변 환경이 잘 조화된 창덕궁의 궁궐 배치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궁궐 건축양식의 상호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우리나라 궁궐 건축의 창의성을 보여 준다.

기준 (ⅲ) : 창덕궁은 전통 풍수지리 사상과 조선왕조가 정치적 이념으로 삼은 유교가 적절히 조화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전통 풍수에 입각하여 선정된 입지와 유교 이념에 따라 상징적, 기능적으로 배치된 창덕궁의 건물들은 조선 시대 고유의 독특한 유교적 세계관을 보여 준다.

기준 (ⅳ) : 창덕궁은 원래의 자연 지형을 존중하기 위해 궁궐 건축의 전통을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창조적 변형을 가해서 지어졌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자연적인 산세와 지형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정형성을 벗어나 자유롭게 건물을 배치해 건축과 조경을 하나의 환경적 전체로 통일시킨 훌륭한 사례이다.

완전성

창덕궁의 공간 구성과 건축물의 배치, 원림은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형식과 유교 예제가 요구하는 내용을 모두 갖추고 있다. 창덕궁은 조정의 관료들이 왕을 보좌하며 업무를 본 외조, 왕이 신하를 만나며 국정을 수행한 치조, 왕과 가족들이 취침하는 침조, 왕이 휴식을 취하는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건물과 조경, 자연지형이 창덕궁 경내에 잘 어우러져 있으며 궁 전체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진정성

창덕궁의 건물과 후원의 원림은 조선후기 축조 당시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궁궐의 지형과 경관 또한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변형되었거나 노후한 시설에 대한 복원과 수리는 공인된 장인들이 관련 문헌과 연구를 바탕으로 전통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진행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조선왕조의 초기에 수도는 개성과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번갈아 이전되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재위 1400∼1418)은 그의 아버지 태조의 뜻에 따라 1405년에 한양을 수도로 정했다. 기존의 경복궁이 길하지 못하다고 여긴 태종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을 명하고 이를 창덕궁이라 이름 붙였다.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궁궐 건축을 관장하는 직책이 만들어졌고, 건축 공사는 전통적 개념의 원칙, 특히 전조후시(前朝後市:궁궐이 앞에, 저자거리는 뒤에)와 삼문삼조(三門三朝:문 3개, 궁궐 3개)의 원칙에 따라 실행되었다. 또한 삼조제도(三朝制度), 즉 앞쪽에 신하들의 공간인 외조(外朝), 중앙에 임금이 정무를 보는 치조(治朝), 뒤에 왕의 처소와 왕비의 처소인 연조(燕朝)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랐다.

궁궐은 주요 건축물과 비원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정원은 잔디, 나무와 꽃, 연못으로 꾸몄으며, 숲이 우거진 후면 가까이에 정자를 세웠다. 주요 건물(어좌가 있는 방, 국사를 돌보는 방, 왕족의 생활공간)은 1405년에 완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좁다고 생각해, 이후 7년 동안 중요한 다른 요소들을 추가한다. 1462년에는 북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한양에 있는 중요한 건물들과 함께 궁궐도 불태워졌다. 7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후 창덕궁은 폐허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왕 선조는 1607년에 궁궐의 재건에 착수했으며 1610년, 선조의 왕위를 이은 광해군 때 공사가 끝났다.

궁궐은 다시 통치의 중심지이자 왕실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청의 침략에 의한 병자호란(1636), 프랑스 함선이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1866), 미국 군대에 의한 신미양요(1871)에 걸쳐 주로 화재를 입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258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재건축할 때마다 원래의 설계를 충실히 따랐다. 수세기 동안 궁 전체에 걸쳐 몇몇 건축물이 추가되었다. 1828년 순조는 전아(典雅)한 스타일의 건물을 짓게 했고, 1846년 헌종은 궁궐 외딴 곳에 낙선재라는 이름의 왕실 거처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추가된 건물은 1921년에 세운 선원전(璿源殿)인데, 역대 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곳이다. 처음에는 인정전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궐의 북서쪽 방향에 있는 덜 중요한 장소로 이전되었다.

보존 및 관리체계

창덕궁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궁궐 전 영역과 주요 건물 및 식재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100m 이내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종로구 조례에 의거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따라서 해당 구역 내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이외에도 창덕궁 후원은 자연환경보전법에 따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창덕궁의 보존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기관으로 창덕궁의 건물 및 시설물 보수정비, 발굴, 예산 지원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또한 40명가량의 직원들이 배치된 창덕궁관리소는 현장에서 직접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상시 모니터링이 진행되고 있으며 3, 4년 주기로 전문가들이 정밀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도시교통과, 문화재과가 협력하여 창덕궁 주변 지역을 관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주기적으로 기본 경관 계획, 지구 단위 계획을 수립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방안 및 사업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창덕궁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창덕궁의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진행한다. 창덕궁 보존의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축물의 화재 위험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5대궁 및 종묘 종합경비시스템구축사업’을 추진하여 화재를 비롯한 문화재 훼손과 재난에 대비하고 있다.

참고번호

816

본문

창덕궁은 수세기 동안 한국의 건축과 정원, 조경 설계, 관련 미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창덕궁은 아름다운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세련된 건축적 가치를 보여 준다. 복합 건축물인 창덕궁은 극동 지역의 건축과 정원 설계의 우수 사례로서 주변 환경에 조화를 이루고 있고, 해당 지형에 적합하게 지어졌으며, 자생종의 수목들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탁월하다고 평가된다.

조선왕조의 초기에 수도는 개성과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번갈아 이전되었다. 1405년, 태종(재위 1400∼1418)은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겼다. 기존의 경복궁이 길하지 못하다고 여긴 태종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을 명하고 이를 창덕궁이라 이름 붙였다. 창덕궁은 풍수지리에서 서울 북쪽을 수호하는 산인 응봉산 자락에 있는 58㏊의 불규칙한 직사각형 지대에 있다.

궁궐의 건축을 위해 만든 궁궐조성도감(宮闕造成都監)은 전통적 설계 원칙에 따라 업무용과 주거용 건물로 구성된 복합 건축물을 지었다. 창덕궁은 전면의 궁궐, 후면의 비원, 세 개의 문과 더불어 정사, 주거, 의전을 위한 세 개의 건물 등으로 구성된다. 주 건물들(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등)은 1405년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7년 동안 나머지 주요 요소들이 추가되었다.

창덕궁은 1462년에 북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에는 한양의 다른 중요 건축물들과 함께 불에 타 허물어지기도 했다. 선조가 1607년에 창덕궁의 재건축을 명하여 1610년에 완료되자 창덕궁은 정사를 돌보고 임금과 왕비가 거주하는 곳이 되어 258년 동안 그 기능을 유지하였다. 이후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재건축 작업은 항상 원래의 설계에 충실하게 따랐다.

2층으로 된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06년에 지어졌고, 화재를 입어 1607년에 재건축되었다. 돈화문과 동일한 양식으로 지은 1층짜리 인정문(仁政門)은 정사를 돌보는 데 쓰이던 정전으로 연결된다. 1592년과 1803년에 화재로 파손되었던 웅장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이 바로 그 안에 있다. 인정전은 두 겹의 단 위에 지은 2층 건물로, 네 개의 거대한 기둥들로 지탱되고 있다. 인정전 안의 조각을 새긴 천장 보개(寶蓋) 아래 연단에는 정교한 어좌가 놓여 있으며, 그 용마루에는 독수리와 용 같은 수호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위로 올라가는 주 계단은 신화 속 수호 동물들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인정전 동쪽에는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선정전(宣政殿)이 있는데, 푸른 기와를 올린 소박한 건축물이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소박한 건물인 희정당(熙政堂)이 있는데, 이곳에는 왕의 침전과 신하들의 침실이 있었다.

근처의 대조전(大造殿)은 왕비를 위한 건물이다. 대조전의 정원은 잔디, 나무, 꽃, 연꽃 연못, 수목을 배경으로 한 정자 등으로 꾸몄다. 정원에는 자생종 나무 100종 26,000개 표본과 함께, 주목(朱木), 돌소나무(stone pine), 스트로부스 소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등 외래종 나무 15종 23,000개의 표본을 심었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수원화성

수원화성
수원화성
수원화성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경기도(京畿道) 수원시(水原市)
좌표 N37 16 19.992, E127 0 29.988
등재연도 1997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이다. 정조(正祖)가 자신의 부친인 장헌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읍치소를 이전하고 주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어 목적으로 조성하였다. 1794년 2월에 착공하여 2년 반에 걸친 공사 후 완공되었다. 성곽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높이 4~6m의 성벽이 130㏊의 면적을 에워싸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신축된 성곽이라는 점,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하여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양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 그 이전의 우리나라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이 많이 첨가되었다는 점,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점 등의 특징이 있다. 1801년에 간행된 화성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통해 공사의 자세한 전말을 알 수 있다.

영문명

Hwaseong Fortress

등재기준

기준 (ⅱ) : 화성은 그 이전 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성곽과 구별되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화성은 기존 성곽의 문제점을 개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를 참고해 포루, 공심돈 등 새로운 방어 시설을 도입하고 이를 우리의 군사적 환경과 지형에 맞게 설치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발달한 실학사상은 화성의 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학자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유럽의 성곽을 면밀히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독특한 성곽의 양식을 결정하였다. 화성 축조에 사용된 새로운 장비와 재료의 발달은 동서양 과학기술의 교류를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기준 (ⅲ) : 화성은 분지로 이루어진 터를 둘러싸고 산마루에 축조된 기존의 우리나라 성곽과는 달리 평탄하고 넓은 땅에 조성되었다. 전통적인 성곽 축조 기법을 전승하면서 군사, 행정, 상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신도시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화성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상업적 번영과 급속한 사회 변화, 기술 발달을 보여 주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완전성

성곽의 중요 부분인 성벽, 4대문 그리고 각종 방어용 시설이 모두 잘 보존되어 있어 군사시설이자 주거지역으로서의 화성의 모습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중요 건물을 포함해 유산의 모든 요소가 유산의 경계 안에 있다.

진정성

화성은 축조 당시의 특성이 잘 남아있어 높은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피해를 포함해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은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엄격한 고증에 따라 전통적인 기술과 재료를 사용해 복원하였다.

역사적 배경

사도세자는 조선왕조 제21대 왕인 영조의 둘째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왕위를 계승한 후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그 축성의 근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다. 또한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 화성은 규장각의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城華籌略)』(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 당시 거중기 녹로(도르래 기구) 등 건축을 위한 새로운 기계를 고안해 큰 규모의 석재를 옮기고 쌓는 데 이용하였다.

수원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 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1975년~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를 갖고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에서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아직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축성할 때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기 때문에 성곽 자체가 ‘효’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도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화성에는 이러한 효 사상과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화성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보존 및 관리체계

화성의 전 영역과 팔달문, 화서문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경기도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또한 ‘수원시 세계문화유산 화성 운영조례’는 화성 및 부대시설의 관람과 활용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화성 보존에 필요한 예산을 배분하고 보수와 유지 관리 및 주변 지역의 현상 변경에 관한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다. 수원시는 주기적으로 개정되는 지구 단위 계획을 통해 성곽 안팎의 건폐율, 용적률, 높이를 제한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문화재 현상 변경 처리 기준을 준용하고 있다. 또한 30명가량의 직원들이 배치된 수원시 화성사업소가 현장에서 유산을 관리하며 유산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과 함께 3, 4년 주기로 전문가의 정밀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수원시 조례에 따라 설립된 ‘수원화성운영재단’은 유산 관련 시설물의 위탁 관리, 관광 활성화, 수익 사업 등을 담당한다. 화성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화성의 문화재수리는 해당 분야별로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담당한다. 화성의 보존에 있어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축물에 대한 화재 위험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 CCTV와 무인 경비 장치를 설치하고 상황실을 운영하는 등 24시간 감시 체계를 작동시키고 있다. 잡초 역시 화성의 성벽에 해를 입힐 수 있는 요인으로, 이를 제거하기 위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고 있다.

참고번호

817

본문

수원 화성은 한국 건축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도시계획, 조경과 그에 관련된 예술에 있어서도 몇 세기에 걸쳐 큰 영향을 끼쳤다. 화성은 극동의 군사 방호 건축물의 전형이며 군사 건축사의 역사적 표본이다. 수원 화성은 군사, 정치, 상업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과 일본의 요새들과 구별된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의 아버지 영조에 의해 부당하게 단죄되어 처형당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1776년, 영조의 왕위를 계승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풍수지리에 있어 가장 길한 장소인 화산에 이장하였다. 그는 아버지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근처에 용주사를 세우고 조정을 수원 팔달산 자락으로 옮겼다. 조정을 옮김으로써 정조는 당쟁을 끝낼 수 있었으며 왕권을 높이고 새 성 안에 있는 안전한 궁궐 내에 머물 수 있었다.

화성은 실학파의 거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 의해 설계되었다. 건축물은 전 영의정이자 형조판서였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감독 하에 1794년~1796년 사이에 완공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 상세하게 묘사된 거중기, 도르래를 비롯한 다른 특수한 건축 장비들은 화성 건축을 위해 디자인되고 제작되었다.

화성 행궁과 제례를 진행하는 사직단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물이 요새 주위에 건축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 중 일부는 뒤에 전쟁과 반란의 와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오직 행궁의 부속 건물인 낙남헌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성의 일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지만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화성을 원래의 정확한 형태대로 복원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거대한 성벽은 팔달산 자락를 포함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는 규칙적이거나 대칭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땅의 지형에 따라 건축되었다. 성벽의 둘레에는 네 개의 문, 수문들, 관측탑, 지휘소, 다연장 화살 발사탑, 화기 보루, 각진 탑, 비밀 문, 봉수 탑, 보루와 벙커 등 본래 48개의 방어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온전히 남아 있다. 각각의 총안 사이의 벽(merlon)에는 세 개의 총안이 있다.

네 개의 문은 중요 지점에 설치되었다. 남쪽의 팔달문과 북쪽의 장안문은 석재를 기본으로 한 2층 목조 건물이며, 측면에 경비하는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고, 불로 구운 벽돌로 지어진 반달형 V자 보루들에 의해 차폐되어 있다. 이들 문은 수원 화성을 통과하는 주된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서쪽과 동쪽의 건물은 1층짜리 건물들이며,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도 역시 V자 보루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1964년에 성의 복원과 재건축 작업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각진 탑들, 지휘소, 관측탑, 보루, 그리고 다른 방어 시설들이 모두 튼튼하게 건축되었으며 최대한의 효율과 최소한의 노출을 위해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러싼 성벽과 문, 탑, 보루 등 기념물은 재료와 기법의 측면에서 진정성을 갖고 있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좌표 N35 47 20.004, E129 13 36.012
등재연도 2000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경주역사유적지구에는 조각, 탑, 사지, 궁궐지, 왕릉, 산성을 비롯해 신라 시대의 여러 뛰어난 불교 유적과 생활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특히 7세기부터 10세기 사이의 유적이 많으며 이들 유적을 통해 신라 고유의 탁월한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로 신라의 1,0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인의 생활 문화와 예술 감각을 잘 보여 주는 곳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총 5개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불교 유적을 포함하고 있는 남산지구, 옛 왕궁 터였던 월성지구, 많은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지구, 불교 사찰 유적지인 황룡사지구, 방어용 산성이 위치한 산성지구가 이에 해당한다.

영문명

Gyeongju Historic Areas

등재기준

기준 (ⅱ) : 경주역사유적지구에는 불교건축 및 생활 문화와 관련된 뛰어난 기념물과 유적지가 다수 분포해 있다.

기준 (ⅲ) : 신라 왕실의 역사는 1,000년에 이르며, 남산을 비롯해 수도 경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신라 문화의 탁월함을 보여 준다.

진정성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구는 각기 다른 종류의 유산이 원래의 위치에 남아있어 진정성이 높으며, 건축, 조각, 탑, 왕릉, 산성은 모두 그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사지 또는 궁궐지의 경우에는 그 터만이 남아 있으며 건물의 원래 배치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기존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보존 및 관리체계

경주역사유적지구는 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사, 명활산 지구 등 5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산 전역과 지역 안의 많은 문화재들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 지역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또한 매장 문화재가 풍부한 지역 특성상, 경주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토목, 건축 행위에는 문화재 영향 검토가 의무화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경주역사유적지구 보존을 위한 예산을 배분하고 보수 및 유지 관리, 주변 지역 현상 변경과 관련된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다. 경주시는 구체적인 보존 관리 및 정비 사업을 담당하며, 남산의 경우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유기적으로 협력해 관리한다. 상시 모니터링과 함께 3, 4년 주기로 전문가의 정밀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좋다. 유산의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담당한다.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지정된 유산 주변의 토지를 꾸준히 매입해 관련 유산을 보다 잘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각 유적 지구 사이의 연결성을 높여 왔다. 등재 당시 동해남부선 철로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권장되었으며, 철로는 2014년에 철거될 예정이다.

유산면적

2,880㏊

완충지역

350㏊

참고번호

976

본문

경주역사유적지구에는 7세기~10세기에 절정을 이룬 한국 불교예술의 뛰어난 전형들이 조각, 부조, 탑파(塔婆, stupa), 사찰 및 왕궁 유적 등의 형태로 집중되어 있다. 한반도는 약 1,000년 동안 신라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경주와 그 주변에 있는 기념물과 유산들은 신라의 문화적 업적을 웅변해 주고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국의 불교 건축 및 일반 건축 발달에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다수의 기념물과 유산들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유적과 기념물이 있는 경주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살던 곳이었다. 신라의 씨족은 기원전 57년, 한반도 남동쪽을 지배했다. 이후에 한반도 내에서는 오랫동안 경쟁하는 왕국들 사이에 투쟁이 있었으며, 신라는 7세기에 중국의 당(唐)과 손잡고 경쟁국을 물리치고 한반도 대부분을 통일했다. 통일신라는 10세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왕조를 유지하였다. 신라의 지배층은 도시에 많은 공공건물, 궁궐, 사찰과 성채를 건설했다. 지배층의 무덤은 이 고대 도시의 인근에 남아 있다.

7세기에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되었고 신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기존의 여러 토착 신앙을 숭앙하였던 장소인 남산은 불교의 성산이 되어 신도들을 끌어 모았고,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과 장인들이 사찰, 사당, 수도처를 지었다.
신라의 멸망과 함께 한반도는 또 한 차례 내부 투쟁의 시기를 겪었다. 한반도는 조선에 의해 다시 통일되어 1910년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18세기에는 만주족의 침략을 받아 황폐화되었다. 조선은 1910년, 일본에 합병되었다. 이 긴 기간 동안 많은 주요 건축물이 쇠락하고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주는 그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세 군의 주요 지구로 구분된다. 더욱이 세계유산에는 황룡사(皇龍寺)와 산성이 포함된다. 남산지구는 경주시의 북쪽에 있고, 지정된 지역에 수많은 선사시대 유적과 사적들이 있다. 월성지구의 주요 기념물은 황성옛터, 경주김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전설의 계림(鷄林), 임해전지(臨海殿址)에 있는 안압지(雁鴨池)와 첨성대(瞻星臺)이다. 고분 공원 지구는 세 그룹의 왕실 무덤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고분들은 돔 형태지만 몇몇은 반달 모양, 조롱박 모양이다. 고분에는 자갈로 덮인 이중 목관이 안치되어 있다. 풍부한 금제 부장품, 유리, 질 좋은 도자기들이 발굴되었으며, 초기 고분 중 한 군데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날개 달린 말을 그린 말다래 천마도(天馬圖)가 발굴되었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전라북도(全羅北道) 고창군(高敞郡), 전라남도(全羅南道) 화순군(和順郡),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강화군(江華郡)
좌표 N34 58 0.012, E126 55 45.012
등재연도 2000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한국의 고인돌은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만들어진 선사시대 거석기념물로 무덤의 일종이며, 고창, 화순, 강화 세 지역에 나뉘어 분포하고 있다. 한 지역에 수백 기 이상의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고 있으며, 형식의 다양성과 밀집도 면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 세 지역의 고인돌은 고인돌 문화의 형성 과정과 함께 한국 청동기시대의 사회구조 및 동북아시아 선사시대의 문화 교류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산이다.

영문명

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

등재기준

기준 (ⅲ) :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은 기원전 100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장례 및 제례를 위한 거석문화 유산이다. 이 세 지역의 고인돌은 세계의 다른 어떤 유적보다 선사시대의 기술과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완전성

세 지역 모두에 수백 기 이상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 지역에 분포한 다양한 형태와 유형의 고인돌을 통해 거석문화 발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알 수 있게 하는 채석장의 존재는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과 성격을 비롯해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유산의 완전성에도 기여한다.

진정성

고창,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 유적은 대부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나다. 거대한 규모의 석조 유적이기 때문에 변형이 쉽지 않아 장기 보존이 가능한 측면도 있다.

역사적 배경

고인돌은 기원전 2000년~1000년, 전 세계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거석문화의 발현이다. 영국의 스톤헨지, 오크니 제도 돌무덤 유적, 그리고 아일랜드의 보인(Boyne) 굴곡부 유적, 서아프리카의 돌무덤처럼 거석을 쓰는 새로운 기술이 돌을 정렬하거나 쌓는 의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고인돌은 기원전 1000년경 동아시아 선사시대의 주목할 만한 유적으로 티베트, 쓰촨, 간쑤와 같은 중국 서부와 산둥 반도, 일본 규슈 북서 지방과 같은 해안 지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창 죽림리 고인돌 유적은 기원전 7세기부터 존재했으며, 기원전 3세기 무렵에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화순의 고인돌은 이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6세기~5세기경에 만들어졌다. 강화 고인돌 유적이 만들어진 연대를 추정하기에는 자료가 불충분하지만,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존 및 관리체계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은 연속유산이며, 세 지역 모두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 지역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고인돌 유적의 보존을 위한 예산을 배분하고 보수와 유지 관리 및 주변 지역 현상 변경과 관련된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다. 유산이 속한 각 지자체는 구체적인 보전관리 및 정비 사업을 담당하며, 현장에는 유산 보존 관리를 담당하는 상시 관리소가 있다. 고창 고인돌박물관과 화순 고인돌 발굴지 보호각, 강화역사박물관은 각 지역 방문객들에게 고인돌에 대한 심도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산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과 함께 3, 4년 주기로 전문가의 정밀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고인돌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고인돌 보존의 가장 큰 위협 요소는 화재와 주변 환경의 훼손이다. 화재 예방을 위해 매년 잡목 제거 작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삭토나 수목의 뿌리로 인해 도괴된 고인돌에 대해서는 학술 발굴조사를 통해 정비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유산면적

52㏊

완충지역

315㏊

참고번호

977

본문

고창, 화순, 강화의 유적은 한국은 물론 세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은 밀도로 분포된 고인돌 군이다. 이것들은 고인돌의 채석, 운반, 건설, 그리고 동북아시아 고인돌 형태의 변화 추이에 대한 중요한 증거들을 보존하고 있다.

고인돌은 기원전 2000년~1000년, 세계 곳곳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거석문화의 발현이다.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시대 무덤은 기원전 1000년경의 돌무덤 몇 백 기를 보여 주고 있다. 고인돌은 티베트, 쓰촨(四川), 간쑤(甘肅)와 같은 중국 서부와 산둥(山東) 반도, 일본 규슈(九州) 북서 지방과 같은 해안 지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은 한국의 청동기시대에 전래되었다. 고창의 죽림리 고인돌 군은 기원전 7세기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의 고인돌 건설은 기원전 3세기에 중단되었다. 화순 고인돌은 이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6세기~5세기경에 만들어졌다. 강화 고인돌 군이 만들어진 연대를 추정하기에는 자료가 불충분하지만,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인돌은 보통 거대한 덮개돌을 지탱하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가공되지 않은 굄돌 따위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 고인돌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중요 인물의 시신 또는 유골 위에 세운 단순한 무덤방으로 알려져 있다. 흙무덤이 고인돌을 덮고 있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풍화작용과 동물들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은 유골을 가족 공동묘지에 묻기 위해 시신을 수습하는 제단으로 쓰였을 수도 있다. 고인돌은 보통 높은 기념물 위에 있는 고지대의 묘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고인돌을 세운 사람들이 낮은 곳에 있는 정착촌에서 고인돌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동아시아에서는 그 모양에 따라 탁자식(북방식)과 바둑판식(남방식), 두 가지 형태의 고인돌이 알려져 있다. 첫 번째, 탁자식은 지상 건축물이다. 네 개의 굄돌을 석곽 또는 석관의 가장자리에 세우고 거대한 덮개돌을 그 위에 올린다. 두 번째, 바둑판식에서는 석벽 또는 적석벽으로 된 무덤방을 땅 밑에 만들고, 덮개돌은 땅 위에 놓인 돌무지에 의해 지탱된다. 바둑판식의 변종도 있는데, 그것은 땅에 묻힌 돌 위에 바로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이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규모가 크고 다양한 형태로, 죽림리 매산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다. 대다수의 고인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언덕의 남쪽 자락 15~50m 높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덮개돌의 모양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 442기가 있다.

화순 고인돌 유적은 고창의 것들처럼 지석강을 따라 야트막하게 이어진 언덕의 능선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의 고인돌 하나하나는 고창보다 온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효산리 고인돌은 158기, 대신리 고인돌은 129기다. 고인돌을 만든 돌이 어디서 채석되었는지 식별이 가능한 경우도 꽤 있다.

강화 고인돌 유적은 연안 섬 강화도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강화의 고인돌은 다른 유적들보다 높은 지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초기의 형태가 많은데, 특히 부근리와 고천리의 고인돌이 그렇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조선왕릉

조선왕릉
조선왕릉
조선왕릉
조선왕릉
조선왕릉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좌표 N37 11 50, E128 27 10
등재연도 2009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조선왕릉(朝鮮王陵)은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고 총 40기에 달한다. 1408년부터 1966년까지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왕릉은 선조와 그 업적을 기리고 존경을 표하며, 왕실의 권위를 다지는 한편 선조의 넋을 사기(邪氣)로부터 보호하고 능묘의 훼손을 막는 역할을 했다. 왕릉은 뛰어난 자연경관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보통 남쪽에 물이 있고 뒤로는 언덕에 의해 보호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이며, 멀리 산들로 둘러싸인 이상적인 자리를 선택해 마련되었다. 왕릉에는 매장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례를 위한 장소와 출입문도 있다. 봉분뿐만 아니라 T자형의 목조 제실, 비각, 왕실 주방, 수호군(守護軍)의 집, 홍살문, 무덤지기인 보인(保人)의 집을 포함한 필수적인 부속 건물이 있다. 왕릉 주변은 다양한 인물과 동물을 조각한 석물로 장식되어 있다. 조선왕릉은 5,000년에 걸친 한반도 왕실 무덤 건축의 완성이다.

영문명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등재기준

기준 (ⅲ) : 유교 문화의 맥락에서, 조선왕릉은 자연 및 우주와의 통일이라는 독특하고 의미 있는 장례 전통에 입각해 있다. 풍수지리의 원리를 적용하고 자연경관을 유지함으로서 제례를 위한 기억에 남을 만한 경건한 장소가 창조되었다.

기준 (ⅳ) : 조선왕릉은 건축의 조화로운 총체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로, 한국과 동아시아 무덤 발전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 준다. 왕릉은 특별한 (또한 규범화된) 건축물, 구조물 요소들의 배치를 보여 준다. 그리고 몇 세기에 걸친 전통을 표현하는 동시에 보강한다. 또한 미리 정해진 일련의 예식을 통한 제례의 생생한 실천을 보여 준다.

기준 (ⅵ) : 조선왕릉은 규범화된 의식을 통한 제례의 살아 있는 전통과 직접 관련된다. 조선 시대에 국가의 제사는 정기적으로 행해졌으며, 지난 세기의 정치적 혼란기를 제외하고 오늘날까지 왕실 및 제례 단체에 의해 매년 행해져 왔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조선왕릉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풍수지리의 원리에 의해 정해졌고, 의례가 결합된 살아 있는 조상 숭배의 전통을 위해 세심하게 조성된 것이다. 세속적인 구역에서부터 경건한 구역으로 이어지는 위계적 배치, 독특한 전각 및 오브제로 이루어진 조선왕릉은 조선왕조의 과거 역사를 상기시키는 조화로운 총체다.

완전성

연속유산으로서 조선왕릉 유적은 왕릉의 환경, 배치, 구성에 대해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완충지역에 포함되어 있는 유적 중 일부에서는 몇몇 예외적 개별 유적을 볼 수 있다. 도시 개발이 몇몇 유적의 경관에 영향을 미쳤지만(선릉, 헌릉, 의릉) 대체로 특정한 능묘의 정상부에서만 도시 건물을 볼 수 있다. 현재, 엄격한 법률로 완충지역 안의 개발을 제한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수리, 복원, 중건되었다. 봉분이 있는 매장지는 법적 규제를 덜 받았으나, 입구와 의례 공간은 목재로 지어진 탓에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진정성

모든 유적이 본래의 기능과 경건함을 잘 유지해 왔으며, 특히 도시화가 덜 진전된 곳의 유적은 더욱 그렇다. 몇 개의 입구들만 바뀌었을 뿐 그 형태와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고, 따라서 조선왕릉은 전체적으로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보존 및 관리체계

문화재보호법 등 실정법에 의해 광범위하게 보호된다. 통합 관리 시스템에 의해 효율적인 보존 계획을 세우고 유산을 관리한다. 개별 유산을 일관성 있게 관리할 수 있는 역량 또한 지니고 있다.

유산면적

1,891㏊

완충지역

4,660㏊

참고번호

1319

본문

무덤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 특히 왕릉의 위치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유산 지정 기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왕릉은 왕족들의 마지막 안식처이기 때문에 왕족의 지위뿐 아니라 예법에 맞게 세심하게 건축된 복합 시설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의 형태는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만들어진 고인돌이다. 삼국시대에는 무덤 건축의 원칙이 수립되었고, 특히 신라 시대에는 한국 특유의 무덤 체계가 발전했다. 목재로 안쪽을 댄 넓은 구덩이를 마련해 돌로 채운 다음 흙으로 덮는 고분 방식이 그것이다. 신라가 (중국과 손잡고) 다른 왕국들을 정복하면서 통일신라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왕릉은 사방을 향해 선 석호(石虎), 상석 등 독특한 석물을 배치하는 특유의 개성을 나타냈다. 왕릉은 평지뿐만 아니라 산지에도 만들어졌다.

고려시대(918~1392)의 왕릉들은 여전히 신라 방식으로 지어졌지만 산등성이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시냇물 사이에 지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의 왕릉은 경계 석주, 석등, T자형 사당, 비석과 비각 같은 새로운 특징들도 갖추고 있다. 호랑이, 사자, 양을 조각한 석물들이 봉분을 둘러싸기도 했다.

특정한 왕이나 그 자손들의 염원을 반영한 몇몇 변형도 있지만 대체로 조선왕조의 왕릉 건축은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고려와 비교했을 때 조선왕조 때 건축된 왕릉은 언덕 위에 조성되었으며 맨 위쪽의 매장지, 중간 지대, 아래쪽 단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은 다음과 같이 5단계에 걸쳐 변화 발전했다.

1. 고려의 원칙이 유지된 시기. 석등과 팔각 석주를 사용하는 변화가 엿보인다.
2. 조선의 원칙이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 조선왕조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초한 자체 장례 체계를 세웠다.
3. 풍수지리의 원리에 주안점을 두고, 능묘의 간소화가 이루어진 시기. 칸막이가 난간으로, 회벽이 석실로 대체되었다.
4. 사실주의적 경향이 나타난 시기. 문인상이 무인상보다 더 높은 곳에 세워지는 방식이 중단되었고 석물이 실제 크기로 줄어들었다.
5. 왕실의 칭호가 왕에서 황제로 바뀐 것을 반영하려는 변화가 보이는 시기. 석물의 수가 늘어나 제례에 쓰이는 단 앞에 배치되었다.

이상의 5단계 발전과 더불어 석물의 형태와 크기는 가벼운 변화를 보였지만, 그 유형과 배치는 바뀌지 않았다.

• 석물
석물은 다음과 같이 4단계에 걸쳐 변화했다.

1. 15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사례로는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1408)과 예종의 창릉(昌陵). 능묘가 언덕 위에 조성됨. 석마(石馬).
2. 15세기 후부터 16세기 후까지. 사례로는 성종의 선릉(宣陵, 1495)과 명종의 강릉(康陵,1567). 석물 크기가 커짐.
3.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초까지. 사례로는 선조의 목릉(穆陵,1630)과 경종의 의릉(懿陵, 1724). 후기로 갈수록 석물의 크기가 작아짐.
4.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사례로는 영조의 원릉(元陵, 1776)과 순종황제의 유릉(裕陵, 1926). 일반적인 세 개의 단 대신 두 개의 단으로 되어 있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시(安東市), 경주시(慶州市)
좌표 N36 32 21, E128 31 0
등재연도 2010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14세기~15세기에 조성된 하회(河回)마을과 양동(良洞)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씨족 마을이다. 숲이 우거진 산을 뒤로 하고, 강과 탁 트인 농경지를 바라보는 마을의 입지와 배치는 조선 시대(1392~1919) 초기의 유교적 양반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옛 마을은 주변 경관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자양분을 함께 얻을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는 종가와 양반들의 기거했던 목조 가옥, 정자와 정사, 서원과 사당, 옛 평민들이 살던 흙집과 초가집 등이 있다. 17세기~18세기의 시인들은 정자와 쉼터에서 마을을 둘러싼 강과 산과 나무의 경치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시를 지어 노래했다.

영문명

Historic Villages of Korea : Hahoe and Yangdong

등재기준

기준 (ⅲ) :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대표적인 씨족 마을의 예로서, 조선 시대 초기의 특징인 촌락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의 입지와 배치와 가옥의 전통에서 두 마을은 500여 년 동안 엄격한 유교의 이상을 따라 촌락이 형성되었던 조선 시대의 유교 문화를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기준 (ⅳ) : 하회와 양동 두 마을은 한반도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조선왕조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양반과 평민 가옥들의 전체적인 배치와 개별적 배치의 조화는 조선왕조의 힘과 영향력이 문학과 철학적 전통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와 문화적 전통에도 배어 있음을 의미한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500년 동안 조선을 통치하였던 양반들의 문화가 꽃핀 한반도의 남동부 지역에 있다. 두 마을은 거리상으로 90㎞ 정도 떨어져 있다. 두 마을은 14세기~15세기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19세기 후반에는 규모도 커지고 구성도 확대되었다. 두 마을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 마을 입지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이고, 지역의 기후 조건에 적합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맞는 가옥으로 이루어졌다.

마을에는 씨족 마을의 대표적 요소인 종가와 양반들이 살았던 크고 튼튼한 목조 가옥, 정자와 정사, 유교 서원과 서당 등이 남아 있다. 또한 평민들이 살았던 단층의 작은 흙집과 초가지붕을 얹은 초가집들도 있다. 정자와 휴식처에서 보이는 마을 주변의 산과 나무, 강의 경치는 17세기~18세기 시인들이 시로 읊었을 만큼 아름답다. 두 마을의 전통 가옥들과 마을의 입지와 배치가 이루는 탁월한 조화는 조선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잘 보여 주는 사례로 꼽힌다. 특히 씨족 마을의 형성이라는 특징적인 체계는 이 지역에 고유한 것으로 500여 년 동안 발전되어 왔다.

완전성

씨족 마을의 대표적인 구성 요소인 양반의 가옥과 평민의 가옥, 공간 배치의 형식, 서당과 서원 등이 유산으로 등재된 이 두 마을에 있다. 하회마을에는 동쪽 4㎞ 지점에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고, 양동마을에는 옥산서원(玉山書院)과 동강서원(東江書院)이 마을에서 각각 8㎞, 4㎞ 떨어진 곳에 있다.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강과 숲, 산이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경관은 하회마을에서 주로 볼 수 있고, 양동마을에서는 그 완전성이 약간 떨어진다. 양동마을에 흐르는 안락천 개울과 수운정(睡雲亭)에서 바라보이는 안강평야와 산등성이는 등재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유산은 최소한의 부작용 외에는 개발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으며, 방치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양동마을의 환경은 다리와 도로, 철도 등의 새로운 사회기반시설의 건설로 일부 훼손된 바 있다.

진정성

씨족 마을의 요소들이 보여 주는 보편적 가치는 가옥과 마을 배치의 우수성과 관련되어 있고, 주변 환경과 씨족 마을의 의식은 유교 전통에 의해 형성된 조선 시대 정치 체제와 문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이 마을들이 위계에 의해 형성된 촌락의 배치와 영향력 있는 씨족과 학자들의 표상을 잘 보여 주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복원할 때 쓴 재료로 인해 유산의 진정성이 약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하회마을에서 건축물의 일부를 새롭게 이용하기 위해 재료를 바꾸었는데, 이러한 변경은 때때로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는 조선 시대의 재료와 기술, 배치, 건축물의 우수성을 흐리게 한다.

유산면적

600㏊

완충지역

885㏊

참고번호

1324

본문

씨족 마을이 융성했던 조선왕조는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며 한국 사회에 유교적 이상을 실현했다. 또한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한국 전통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풍수지리에 따라 지역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며 마을이 형성되는 풍습은 그 이전 고려 시대에 나타났다. 하지만 지주들과 향촌 관리들인 양반이 유교적 풍습에 따라 새로운 마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마을을 조성해 나간 것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일이었다.

보통 씨족 마을에는 한 성씨 또는 두 성씨의 양반들이 성곽을 쌓아 마을을 지키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비롯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이러한 씨족 마을에서 문관과 무관이 배출되기도 했다.

하회마을은 고려 시대 말에 허씨와 안씨, 그리고 류씨 성의 세 씨족이 새로운 양반 정주지를 찾아 형성한 마을이다. 16세기 말에 류씨 가문은 걸출한 정치가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이는 마을의 건축물, 특히 정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후 마을은 번성했으나 17세기 말에 허씨와 안씨 일가가 마을을 떠나면서 류씨 단독의 씨족마을이 되었다. 마을은 18세기~19세기까지 계속 커져 갔다. 1980년대에 들어와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고 1991년에는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전통 가옥 두 채가 새로 지어지면서 이런 추세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양동마을은 이씨와 손씨 씨족의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로 성장한 정주지의 예이다. 이 두 씨족은 16세기에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마을은 두 씨족의 일가들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20세기 초, 마을에 철도가 건설되고 학교가 지어졌다. 1940년대에는 사찰이 세워졌고 10년 뒤에는 교회도 들어섰다. 1970년대에는 안락천에 다리가 놓이고, 1971년에는 안강평야의 농경지를 재정비하여 마을의 공동 저장고를 지었다. 1980년대에 이 마을은 한국의 다른 마을들처럼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지는 않았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경기도(京畿道) 광주시(廣州市)·성남시(城南市)·하남시(河南市) 일원
좌표 N 37° 28′ 44″ , E 127° 10′ 52″
등재연도 2014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에 축성된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17세기 초, 중국 만주족이 건설한 청(淸)나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남한산성은 승군(僧軍)이 동원되어 축성되었으며 이들이 산성을 지켰다.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전해온 성제(城制)의 영향과 서구의 화기(火器) 도입에 따라 변화된 축성 기술의 양상을 반영하면서 당시의 방어적 군사 공학 개념의 총체를 구현한 성채이다. 오랜 세월 동안 지방의 도성이었으면서 아직도 대를 이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인 남한산성의 성곽 안쪽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군사·민간·종교 시설 건축물의 증거가 남아 있다. 남한산성은 한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영문명

Namhansanseong

등재기준

기준(ii): 남한산성의 산성 체계는 17세기에 극동지역에서 발달한 방어적 군사 공학 기술의 총체를 구현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중국과 한국의 성제를 재검토한 결과이자 서구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화기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한국의 산성 설계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으며 축성된 이후에는 한국의 산성 건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기준 (iv): 남한산성은 요새화된 도시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이다. 17세기 조선시대에 비상시 임시 수도의 기능을 하도록 계획·건설된 남한산성은 이전부터 존경받아온 전통인 승군에 의해 축성되었으며 산성의 방어 역시 승군이 담당하였다.

완전성

남한산성의 중요성·다양성 그리고 범위는 문화유산 구성의 완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남한산성은 분명하게 정의된 역사적 역할과 함께 산성의 구조, 옛 산성의 기능 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문화유산의 특성을 충분하게 지니고 있다. 이 문화유산이 지니고 있는 역사와 지식, 즉 남한산성이라는 산성이 지닌 방어적 군사 공학이라는 개념의 도출에 영향을 미쳤던 다양한 요인에 대한 역사와 지식은 만족할 만큼 충분하다. 그러나 민속적·네오애니미즘(neo- animism, 심령주의)적 성격을 띤 오늘날의 여러 활동이나 지방 분권적 성격의 활동은 유산의 완전성이나 탁월한 보편적 가치라는 측면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진정성

유산을 구성하는 유형적 요소인 산성을 보수 및 개축할 때에는 산성의 형태·구조·자재 등에 있어 특별히 정밀한 과학적 지침을 따랐다. 이러한 활동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새롭게 재축(再築)되고 있다. 이러한 재축 과정은 역사적으로 전해져오는 남한산성의 건축에 대한 광범위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유산의 요소 중에서 특히 목재를 주로 하여 건축된 사찰이나 건축물 유산의 진정성에 대한 보호는 이미 명확하게 확인되었고 과학적으로 인정된 진정성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지나치게 체계적으로 계획된 복원 정책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책 덕분에 오래 전에 소실되었던 건축물들을 재축할 수 있었는데, 특히 19세기 일제강점기 당시 전소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옛 터에는 당시의 모습을 지닌 행궁(行宮)을 복원할 수 있었다.

보존 및 관리체계

남한산성 성곽 및 기념물을 포괄하는 전체 권역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국가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있다. 오늘날 총 218점에 달하는 유형 및 무형의 문화 요소 각각은 유적 및 사적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국가·지방 그리고 지역 수준에서 보호되고 있다. 문화적 앙상블에 대한 기술 및 관광 관리는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Namhansanseong Culture and Tourism Initiatives, NCTI)에서 총괄하고 있다. 문화재 자체와 완충지역은 경기도 도립공원(NPPO)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기도 도립공원 측은 식생·녹지·기반시설(산책로·공원 지역 등) 등을 관리·관할한다. 중앙행정기관인 문화재청, 그리고 해당 지방 및 시도 지자체에서는 유산 및 완충지역의 보호·보존·관광 관리를 위하여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또한, 다수의 시민 자원 봉사 단체가 유산의 관리 및 증진에 참여하고 있다. 관리계획에는 부문별 계획, 특히 본 유산의 보존에 관한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역사유적지구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충청남도 공주시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
좌표
등재연도 2015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대한민국 중서부 산지에 위치한 백제의 옛 수도였던 3개 도시에 남아 있는 유적은 이웃한 지역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고대 백제 왕국의 후기 시대를 대표한다.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에 멸망할 때까지 700년 동안 존속했던 고대 왕국으로, 한반도에서 형성된 초기 삼국 중 하나였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 3개 지역에 분포된 8개 고고학 유적지로 이루어져 있다. 공주 웅진성(熊津城)과 연관된 공산성(公山城)과 송산리 고분군(宋山里 古墳群), 부여 사비성(泗沘城)과 관련된 관북리 유적(官北里遺蹟, 관북리 왕궁지) 및 부소산성(扶蘇山城), 정림사지(定林寺址), 능산리 고분군(陵山里古墳群), 부여 나성(扶餘羅城), 그리고 끝으로 사비시대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익산시 지역의 왕궁리 유적(王宮里 遺蹟), 미륵사지(彌勒寺址) 등으로, 이들 유적은 475년~660년 사이의 백제 왕국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역사유적은 중국의 도시계획 원칙, 건축 기술, 예술, 종교를 수용하여 백제화(百濟化)한 증거를 보여주며, 이러한 발전을 통해 이룩한 세련된 백제의 문화를 일본 및 동아시아로 전파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영문명

Baekje Historic Areas

등재기준

기준 (ii):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고대 왕국들 사이에 있었던 상호교류를 통해 이룩된 백제의 건축 기술의 발전과 불교 확산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기준 (iii):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볼 수 있는 수도의 입지, 불교 사찰과 고분, 건축학적 특징과 석탑 등은 백제 왕국의 고유한 문화,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이다.

완전성

유산은 전체적으로 유산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를 충족하고 있다. 구성 유산들은 백제의 수도가 지녔던 역사적 기능을 입증하며, 유산과 해당 유산의 배경 사이의 관계를 증명할 만한 충분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부소산성 북문 인근에 있는 양수장(揚水場)과 관북리 유적지 내에 남아있는 일부 주거 시설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유적은 개발이나 방치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진정성

연속 유산이 분포된 8개의 유적지는 대부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복구와 복원 사업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개입에 영향을 받아왔다. 적용된 자재와 기법은 대체적으로 전통을 따랐다. 고분과 사찰은 본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절터의 경우에는 크지 않은 규모의 도시 개발 지역 한 가운데에 있어서 마치 고립된 섬과 같은 형상이지만 산성과 고분의 경우 산림 경관 내에 숲으로 둘러싸인 원래의 입지를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보존 및 관리체계

유산을 구성하는 모든 유적은 2012년에 개정된 1962년 문화재보호법, 2013년에 개정된 2004년 ‘고도(古都)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 그리고 충청남도(2002년)와 전라북도(1999년)의 문화유산보호조례에 의거하여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유산을 구성하는 유적의 경계로부터 500m 이내 완충 지역에는 ‘문화재보호법’과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고도 8m 이상의 건물 신축을 금지하고 있다.

이 유산은 3개의 각 지역별 주민협의회를 조율하는 주민협의회를 통해 수렴된 지역사회 단체의 의견뿐 아니라 중앙 및 지방과 지역 자치단체의 의견을 통합 조정하는 ‘백제역사유적지구 통합관리사업단’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에 있는 3개의 지역별 주민협의회는 보존 및 관리, 이용과 홍보를 책임지며 지역사회의 참여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유지한다는 목표 아래 3개 도시의 유적을 관할하는 기관들의 노력을 통합하기 위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은 ‘2015~2019년 보존 및 관리 계획’이 이미 입안되었다. 이 계획은 현재, 백제역사유적지구 유산에 관한 전체적인 관광 관리 전략뿐만 아니라 각 구성 유적에 대한 탐방객 관리 계획까지 포함하는 내용으로 확대 수정되는 중이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한국의 서원

한국의 서원
한국의 서원
한국의 서원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경상북도 영주시(소수서원), 경상남도 함양군(남계서원), 경상북도 경주시(옥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도산서원), 전라남도 장성군(필암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도동서원), 경상북도 안동시(병산서원), 전라북도 정읍시(무성서원), 충청남도 논산시(돈암서원)
좌표 소수서원 영주 N 36° 55’ 31.46’’ E 128° 34’ 48.39“
남계서원 함양 N 35° 32’ 54.57’’ E 127° 46’ 59.71“
옥산서원 경주 N 36° 00’ 42.14’’ E 129° 09’ 47.91″
도산서원 안동 N 36° 43’ 38.27’’ E 128° 50’ 36.34″
필암서원 장성 N 35° 18’ 38.82’’ E 126° 45’ 10.28″
도동서원 달성 N 35° 42’ 03.33’’ E 128° 22’ 18.87″
병산서원 안동 N 36° 32’ 27.66’’ E 128° 33’ 11.16″
무성서원 정읍 N 35° 36’ 06.61’’ E 126° 59’ 01.45″
돈암서원 논산 N 36° 12’ 33.21’’ E 127° 10’ 50.75″
등재연도 2019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 시설의 한 유형으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에까지 향촌 지식인인 사림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유산은 교육을 기초로 형성된 성리학에 기반한 한국 사회 문화 전통의 특출한 증거이다. 이 유산은 동아시아 성리학 교육기관의 한 유형인 서원의 한국적 특성을 나타낸다.

영문명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등재기준

기준 (iii) 신청유산은 조선시대 교육 및 사회적 활동에서 널리 보편화되었던 성리학의 탁월한 증거이다. 이 유산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 사이에 건립되었으며, 교육을 기초로 형성된 독특한 역사 전통과 성리학의 가치를 나타낸다. 향촌 지식인들은 이 유산을 통해 성리학 교육을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한 교육 체계와 건축물을 창조하였으며, 전국에 걸쳐 성리학이 전파되는데 기여하였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신청유산은 향촌 지식인들에 의해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 사이에 건립되었다. 이 유산은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의 9개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이 유산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한국 사회의 많은 부분에 기초가 되었던 성리학 교육을 증진한 교육기관의 탁월한 증거이다. 서원에서 향촌 지식인들은 교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육 체계와 유형적 구조물들을 창조하였다. 그들은 성리학 경전과 연구를 수행하였고,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이상적 인간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향촌사회의 선현들을 제향하였고, 제향인물을 통해 강한 학문적 계보를 형성하였다. 또한, 향촌 지식인들은 이 유산을 기초로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성리학이 사회 전반에 전파되는데 기여하였다.

이 유산은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던 성리학이 지역화되고 변영된 톡특한 과정을 통합적으로 보여준다. 이 유산은 한국에서 서원 건축의 정형화에 의해 완성된 독특한 문화전통을 나타낸다. 9개로 구성된 이 유산은 한국 서원의 특성과 발전을 보여주며, 서원이 건축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하였는지 각각의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완전성

신청유산은 한국의 성리학의 발전과 서원 유형의 정립과정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서원 9개로 구성되어 있다. 각 구성요소는 집합적으로 신청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며, 각각 하나의 온전한 서원으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완전성을 갖추고 있다.

신청유산은 조선시대 서원의 필수 공간 요소인 제향공간, 강학공간, 교류와 유식공간을 구성하는 각 건축물뿐만 아니라 원래의 지형, 주변환경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제향공간을 구성하는 사우와 사우 내부의 위패, 전사청 등이 온전하게 존재하며,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강당과 재사, 도서관, 각 건물의 편액 등이 온전하다. 누각 등 회합 및 유식공간의 구성요소 역시 온전하며, 주변의 경관, 지형 등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서원 주변의 경관 중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입증할 중요한 부분은 모두 유산구역이나 완충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진정성

신청유산은 형태와 디자인, 자재와 구성물질, 전통적 기법과 관리체계, 입지와 주변환경 측면에서높은 수준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신청유산은 서원 설립운동의 초기에 해당하는 16세기 중반부터 약 1세기 기간 동안 건립된 대표적 서원으로서, 역사발전 과정에서 훼철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였다. 제향자의 연고 및 경관을 포함하는 입지 환경, 제향공간, 강학공간, 교류와 유식공간의 건축 배치, 각 건물의 유형적 형태, 목재와 기와를 사용하는 물질 구성, 보존 관리의 체계 등을 원래의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다.

형태와 디자인 측면에서 신청유산은 서원 역사의 건축적 구현을 보여준다. 한국의 서원은 제향, 강학, 교류와 유식 공간의 유기적 결합을 하나의 전형적인 형태로 완성하였고, 이를 지금까지 변형 없이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목조 건축기법과 좌식형 생활 관습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건축 형태를 만들어 내었다.

자재와 구성물질, 전통적 기법과 관리체계 측면에서, 신청유산은 서원 설립 당시의 건축적 결과물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조선시대 건축기법과 자재로 최소한의 보수를 해오고 있으며, 진정성과 완전성을 해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영건하였던 원형을 따라 현재는 공인된 기술인력과 훈련받은 장인들에 의해 최소한의 보수를 행한다. 신청유산은 문화재청과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관리하며, 전승되어오는 전통 기술을 적용한다. 목조건축에 위해를 줄 수 있는 흰개미, 부식, 화재 등에 대해 공인된 전문집단의 관리를 받고, 예방조치를 한다.

신청유산은 기록유산, 무형유산에 속하는 것들도 잘 보존, 전승하고 있다. 서원을 거쳐간 인물들이 남긴 전적, 문집, 기문, 목판 등은 잘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제향은 지금까지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 계승되어 시행되고 있다. 기록유산과 무형유산 모두 개별 유산들이 지속된 전통을 보여준다.

보존 및 관리체계

신청유산인 한국의 서원은 9개의 서원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신청유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온전히 포함하고 서원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경계가 설정되었다. 또한 서원의 보호·관리는 대한민국의 문화재보호법과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관련 조례 등을 통해 법적 보호를 받고 있으며, 이미 국가 사적으로 각각 지정되어 해당 서원은 물론 주변 지역까지도 보호·관리되고 있다.

신청유산은 제향-강학-교류와 유식이라는 기능과 유기적인 공간구성을 통해 서원의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이에 각각의 기능에 해당되는 건축물과 시설물들이 유산구역에 포함되었고, 서원의 입지와 주변 환경 등을 고려한 산림, 농경지, 강, 계곡 등이 완충구역에 포함되어 보호·관리되고 있다.

현재까지 신청유산을 위협하는 개발 및 환경압력 등 유산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요인은 경미하다. 이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주변 지역의 토지 이용과 개발 행위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청유산 대부분이 목재 건축물인 점을 감안한다면 잠정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화재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소화설비 및 상시 감시체계를 구축하여 재해 및 재난에 대응하고 있다. 또한 세계유산 등재 이후 방문객과 관광 산업에 의한 서원의 보호・관리에 대한 영향은 향후 증대할 것으로 예상되나 해당 서원과 지방자치단체에서 서원 보존관리 계획을 수립하여 영향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다각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경상남도 양산시, 경상북도 영주시, 경상북도 안동시, 충청북도 보은군, 충청남도 공주시, 전라남도 순천시, 전라남도 해남군
좌표 통도사 양산 N35˚ 29’ 17”, E129˚ 03’ 56”,
부석사 영주 N36˚ 59’ 56”, E128˚ 41’ 15” ,
봉정사 안동 N36˚ 39’ 12”, E128˚ 39’ 47” ,
법주사 보은 N36˚ 32’ 31”, E127˚ 50’ 00”,
마곡사 공주 N36˚ 33’ 32”, E127˚ 00’ 43” ,
선암사 순천 N34˚ 59’ 45”, E127˚ 19’ 52”,
대흥사 해남 N34˚ 28’ 32”, E126˚ 37’ 01”
등재연도 2018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하 ‘산사’)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불교 유산이다. ‘산사’를 구성하는 7개 사찰은 모두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종교 활동, 의례, 강학, 수행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으며 다양한 토착 신앙을 포용하고 있다. ‘산사’의 승가공동체는 선수행의 전통을 신앙적으로 계승하여 동안거와 하안거를 수행하고 승가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한 울력을 수행의 한 부분으로 여겨 오늘날까지도 차밭과 채소밭을 경영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여 수많은 불교 사찰들이 창건되었는데, 도시에 세워진 사찰들과 산지에 세워진 사찰들로 나누어진다. 이후 조선(1392~1910)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도시 사찰의 대부분은 강제로 폐사되었지만, ‘산사’를 포함한 산지사찰들은 현재까지 승려들의 신앙과 정신 수행, 일상생활을 위한 승원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특징을 지속하여 왔다. 즉, 도시 사찰은 거의 사라진 반면 산지사찰인 산사들은 오히려 신자들의 신앙처로서의 기능을 확대하고 수행에 필요한 공간과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산사’를 구성하는 7개 사찰은 종합적인 불교 승원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또한 산기슭에 계류를 끼고 입지하여 주변 자연을 경계로 삼는 개방형 구조를 나타낸다. 최소 규모로 축대를 쌓아 자연 지세에 순응함으로써 사찰의 건물 배치는 비대칭적이고 비정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연 순응적으로 사찰의 영역 확대가 이루어져 곡저형, 경사형, 계류형이 대표적인 사찰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영문명

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

등재기준

기준 (iii):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오늘날까지 불교 출가자와 신자의 수행과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는 종합적인 승원이다. 불교의 종교적 가치가 구현된 공간구성의 진정성을 보존하며 지속적으로 승가공동체의 종교 활동이 이어져 온 성역으로서 특출한 증거이다.

완전성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오늘날까지 불교 출가자와 신자의 신앙공동체가 수행과 신앙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살아 있는 승원으로서 안거수행 등 철저한 수행이 이루어지는 7개 사찰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경사가 완만한 산기슭에 입지하여 주변 자연으로 사찰의 경계를 구성하는 자연친화적이며 개방형 구조를 보인다. 또한, 창건부터 지금까지 주불전 영역의 원지형을 유지하고 시대별 사회상을 중창과 중건을 통해 사찰구조에 반영함과 동시에 곡저형, 경사형, 계류형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신앙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신청유산은 17세기에 마당 중심으로 주불전과 부속 건축물이 신앙과 공간구성 측면에서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유기적 가람구조 양식을 확립하였다. 산사는 종합승원으로서 신앙수행 생활이 지속되어 오면서 입지와 공간조성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는 모든 필수요소들은 신청유산의 경계 내에 포함되어 있으며 훼손 없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사를 구성하는 각 사찰의 중심영역과 자연적 요소를 포함한 진입구역은 모두 법률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따라서 신청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현재까지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을 위협하는 개발압력이나 환경압력 등 심각한 요인은 없었다. 다만 목조건축물의 취약점인 화재에 대비하여 소화설비 등 소방시설 및 상시 감시체계가 구축되어 재해와 재난에 대비하고 있으며, 신청유산에 대한 국제적인 보존 관리 우선 사항과 절차에 따른 통합 보존관리계획이 수립되어있다. 유산 내의 모든 요소들은 정기적으로 모니터링 되고 있으며 철저하고 효과적인 보호 조치들이 신청유산의 지속적인 보존과 보호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유산의 연속적인 구성요소들의 경계들은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전달하는 특징과 과정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구획되었으며, 완충구역은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보호하기에 적절한 규모로 설정되었다. 그러므로 각각의 구성요소뿐만 아니라 신청하는 연속유산 전체의 완전성은 온전하게 보장된다.

진정성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용도와 기능, 입지와 환경, 전통 기술 관리체계 측면에서 높은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용도와 기능면에서 산사는 복합적인 가람구조 속에서 승려와 일반인들의 신앙, 수행, 생활이 단절 없이 지속되어 왔고 살아있는 종합승원으로서의 기능을 현재까지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어 높은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입지와 환경면에서 신청유산은 산과 계류 등의 자연을 경계로 삼고 주불전의 원지형을 창건 이래 훼손없이 온전하게 진정성을 보존하여 왔으며, 사찰의 확장 과정에서 자연지형에 순응한 결과 경사형과 곡저형, 계류형의 형태로 나타난다. 전통 기술 관리체계 측면에서 신청유산의 주요 구성요소인 석조시설물과 목조 건축물은 진정성을 증거한다. 석탑, 석등, 승탑 등의 석조유산은 초창 시기 경내 공간을 확인해 준다. 목조건축물들은 내구성의 한계로 인해 중건과 중수, 보수 등이 있었으나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중수원칙에 따라 동일한 장소에서 보존 관리되어 왔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거나 우수한 목조건축물들이 산사에 보존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산사는 용도와 기능, 입지와 환경, 전통, 기술과 관리체계 측면에서 세계유산 협약의 실행을 위한 운영지침과 진정성에 관한 나라문서에서 규정한 문화적 맥락에서 진정성의 조건을 만족한다. 더불어 정밀한 실측조사와 기록화 작업을 통해 재해 및 재난에 대비하고 진정성에 근거한 보수를 위한 자료로도 활용된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각 사원마다 특유의 불교의례를 거행하여 높은 진정성을 갖는다. 날마다 거행하는 일일 예불과 연중 기념일에 거행하는 연중의례 외에 사찰 별로 특징적인 특별의례를 거행한다. 안거의 마지막 기간에는 신도들도 참여하여 며칠 동안 밤새워 수행하는 용맹정진을 시행한다. 각 산사에서 대규모 신도들이 참여하는 야외 의식은 마당에서 이루어지며 마당에 있는 대규모 의식을 위해 걸었던 탱화를 받치는 괘불대의 존재에서 역사적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보존 및 관리체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일곱 개의 사찰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찰과 정부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이 구성요소들은 문화재보호 법(1962년 제정)과 각 지방자체단체에서 제정한 문화재보호 조례에 의해 법률적으로 보 호• 관리되고 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문화재청의 지도 아래 문화재보호법과 조례들을 기반으로 종교기관과 주민,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관계자들의 다양한 노력에 의해 보존, 관리되어 오고 있다. 따라서 신청유산 주변의 개발은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각 사찰이 산지에 입지해 있어 외부인에 의해 위협을 야기하거나 부정적인 환경에 노출된 잠재적 위험은 매우 적다. 신청유산은 현재까지 자연재해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추후 발생할 수 있는 자연재해 및 화재에 대한 대응 매뉴얼을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다. 목조건축물이 많은 산사의 특성상 산불 등에 의해 화재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산사에는 화재감지설비와 CCTV, 소화설비가 설치되어 있고 인근의 소방서와도 긴밀한 연락체계가 구축되어 있다. 또한 문화재관리원에 의해 24시간 상시 감시 및 모니터링을 통해 화재 위험에 대비하고 있다. 사찰을 방문하는 관광객으로 인한 관광압력은 현재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로 인해 예상되는 관광압력에 대해서는 7개 사찰 모두 충분한 수용 능력이 있으며 적절하게 통제하거나 관리가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보존 및 관리의 종합적인 요구를 충족한다.

본문

산사는 한국의 산지형 불교 사찰의 유형을 대표하는 7개의 사찰로 구성된 연속 유산이다. 이들 7개 사찰로 구성된 신청유산은 공간 조성에서 한국 불교의 개방성을 대표하면서 승가공동체의 신앙•수행•일상생활의 중심지이자 승원으로서 기능을 유지하여왔다.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로 대한민국 전국에 결쳐 분포하고 있다.
한국에는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면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인 조선왕조(1392~1910) 기간 동안에는 불교에 대한 억압 정책으로 인해 도시 사찰의 대부분이 강제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7개 사찰을 포함한 일부 산사 등은 폐사되지 않고 살아남아 일반 신자들을 위한 신앙처로서의 기능이 확대되었으며 수행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산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불교 유산이다. 모든 유산 구성 요소들은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종교 활동, 의례, 강학, 수행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으며 다양한 토착 신앙을 포용하고 있다. 산사의 승가공동체는 선수행의 전통을 신앙적으로 계승하여 동안거와 하안거를 수행하고 승가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한 울력을 수행의 한 부분으로 여겨 오늘날까지도 차밭과 채소밭을 경영하고 있다.
한반도의 불교 사찰은 도시에 세워진 사찰들과 산지에 세워진 사찰들로 나누어진다. 이후 조선왕조(1392~1910)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도시 사찰의 대부분은 강제로 폐사되었지만, 신청유산을 포함한 산지사찰들은 현재까지 승려들의 신앙과 정신 수행, 일상생활을 위한 승원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특징을 지속하여 왔다. 즉, 도시 사찰은 거의 사라진 반면 산지사찰인 산사들은 오히려 신자들의 신앙처로서의 기능을 확대하고 수행에 필요한 공간과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구성하는 7개 사찰인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는 종합적인 불교 승원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또한 산지에 입지함으로써 곡저형, 경사형, 계류형의 3가지 형태로 유형화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불교 승원이다.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종묘

종묘
종묘
종묘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위치
좌표
등재연도

사진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요약

영문명

등재기준

탁월한 보편적 가치

유산면적

완충지역

참고번호

내용출처 : 유네스코한국위원회